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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현대예술과 견유주의 : 2017 그랜드오픈 에세이
삼월 / 2017-12-10 / 조회 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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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과 견유주의

 

푸코세미나 삼월

 


1. 푸코의 권력 성찰과 견유주의


푸코는 일생 동안 권력에 대해 연구해온 철학자다.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록들을 연대기 순으로 읽으면, 권력에 대한 푸코의 성찰이 변화해 온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초기에 푸코는 군주가 가지는 주권으로서의 국가권력을 연구했다. 권력 형성과정에서 배제와 규율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포착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 배제와 규율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 의해 작동되며, 권력의 주체가 모호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권력의 주체가 모호해지는 만큼이나 저항의 주체도 모호하다. 사회의 구성원은 모두가 권력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 안에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 권력을 실천하는 주체로 구성되면서도, 권력에 대한 증오심을 품은 채로 저항을 동시에 실천하려고 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자신이 권력의 주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저항의 주체로 자신을 구축해 나가려 한다.

후기의 푸코는 이 권력의 허구성과 저항의 허구성에 대해 동시에 문제를 제기한다. 개인은 저항을 위해 표상 속에서 권력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당연히 각자의 표상 속에서 권력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억압과 살육을 행하는 폭군의 이미지에서부터 창백하고 근엄한 빅브라더의 얼굴까지. 이런 과정을 통해 진리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획득되어야 할 무엇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권력도 우리의 외부에 있으며 소유나 저항이 가능한 무엇으로 인식된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이처럼 우리 외부에 있는 것처럼 인식되던 진리와 권력의 문제를 주체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이 주체는 더 이상 근대철학이 지향해온 주체로 불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주체라는 억지스러운 단어에서 벗어나 ‘자기’의 문제를 객관적 진리가 아닌, 자신만의 ‘진실’로 성찰할 수 있는 주체로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는 어떻게 진실을 성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푸코는 스스로를 자유민이라 여겼던 고대 그리스 시민들의 윤리적 성찰에 주목한다. 자유민들의 자유는 의지의 자유가 아닌, 악덕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자유민들은 스스로를 통치의 주체로 인식하고, 자유와 명예를 추구한다. 여기서 통치는 정부기관의 통치, 타자에 대한 통치, 자기에 대한 통치를 모두 포괄한다. 이 통치에 대한 준비와 훈련의 과정이 자기돌봄(혹은 자기배려)이라 할 수 있다. 자기만의 통치스타일이며 실존의 방식인 에토스가 자기돌봄을 통해 형성된다. 결국 에토스는 개인이 권력을 가진 윤리적 주체로써, 권력을 성찰하고 실천하는 방식이다.

푸코는 이때부터 인식과 저항의 문제에서 진실과 통치의 문제로 연구의 방향을 옮겨간다. 개인은 진실에 접근하고 실존을 사유하며 통치를 실천하는 주체로 변형된다. 주체는 관계와 행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충격과 변형을 통해 삶의 진실을 포착한다.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민들의 윤리적 모델로 발굴해낸 인물이 바로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이다. 인간의 진실을 지향했던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가 우리에게 진실을 성찰하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견유주의자의 형상은 지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모습 속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여기 한 예술가의 작업을 소개하면서, 디오게네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몇 가지 삶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2. 균열과 충격 : 예술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동생이 갑자기 죽은 이후 김도희 작가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오래된 냉장고의 소음이었다. 냉장고는 누워있는 작가의 곁에서 하루 종일 웅웅웅웅 소리를 냈다. 어느 날 작가는 냉장고를 다리 위에서 밀어 떨어트리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파괴와 상실, 애도와 그리움은 늘 함께 붙어 다닌다. 작가는 냉장고를 밀어 떨어트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냉장고를 떨어트리는 과정은 고스란히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작가는 본래의 형체를 잃고 처참하게 부서진 냉장고를 정성스럽게 수습했다. 염을 하고 보니 그 자체가 관처럼 보이기도 하는 냉장고를 옆에 두고, 14일을 전시장 안에서 지냈다.

전시장에는 냉장고를 떨어트리는 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분노에 찬 여자의 고함소리도 함께였다. 창문을 막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 작가는 사람들이 주는 음식들로만 연명했다. 작가의 일지에는 자신이 먹은 것과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들이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전시장에서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가끔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피하기도 한다. 끝내 자신이 왜 스스로를 전시장에 유폐시켰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왜 냉장고를 다리에서 밀어 떨어트리고 싶다는 상상을 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리와 상상 속에서 작가의 작업을 바라본다.

철학과 예술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것은 어떤 메울 수 없는 균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 속에서 시작된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로 이해하고 규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유하기 시작한다. 이 규명도 불가능하고, 소통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술 역시 시작된다. 인식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인식하려 하고, 소통할 수 없는 어떤 것과 소통하려 하는 그 지점에서 철학과 예술이 시작된다. 철학과 예술은 거기서 어떤 진실을 발견해내어 자기 삶으로 끌어들어야 한다. 그 진실이 우리 삶을 변형시킴과 동시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해준다. 푸코는 이 극한의 작업을 자기돌봄이라고 불렀다. 자기돌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실존의 미학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3. 고통과 안정 : 진실은 온화하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을 잘 돌보고 있느냐고. 시민들은 스스로가 통치의 주체로서 얼마나 자신을 잘 돌보았는지를 답해야 했다.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잘 돌보지 못했거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시민들로 하여금 인식의 극한을 경험하도록 했던 것이다. 반면에 디오게네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 시민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 보고 싶지 않은 것들 속에 인간의 진실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기 위해 디오게네스는 거리에서 먹고, 자고, 성행위를 하며, 자신의 삶을 전시했다.

김도희 작가의 작업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구태여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드러내어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주는 진실은 상실이 평온한 애도를 통해 치유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종의 파괴 행위를 통해 우리가 생존의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규명 불가능한 행위와 소통 불가능한 외침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나서야 작가가 겪은 불면의 고통은 사그라진다. 또 하나 이 작업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김도희 작가가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어떤 행위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데 있다.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우리에게 행위를 통해 어떤 물음들을 던진다. 인류의 정찰병이 되어 우리가 고통과 악덕으로부터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했던 견유주의자들처럼 작가는 인간이 고통에 직면하고 대결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김도희 작가는 물음 자체가 지닌 힘을 아는 사람이다.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니라 물음이 지닌 힘을 알지 못한다. 애초에 물음은 답을 상정해 두고 있지 않다. 물음 자체가 파괴이고, 생성이다. 염을 한 냉장고가 있는 전시장을 벗어나는 작가는 파괴와 생성의 힘으로 번득인다.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피부와 근육 사이에 통증이 흐’르는 시간들도 견디다 보면 익숙해질 때가 있다. 물음이 둔탁해지기 전에, 서둘러 답을 지목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공간을 벗어난다. 벗어나는 순간 처절하게 자신의 고통과 싸우고 있던 그 곳이 자신의 집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세계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견유주의자들처럼,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기거할 수 있는 장소를 점점 늘려간다.

 

 

4. 변화와 지속 : 통화의 가치를 바꿔라

 

소크라테스가 도시국가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윤리와 규범을 질문을 통해 이끌어냈다면, 디오게네스는 그 규범들의 가치에 대해 물었다. ‘통화의 가치를 바꿔라’가 디오게네스가 받았던 신탁의 내용이며, 어원상 통화는 관습이나 법과 관계가 있다. 견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학이 삶을 위한 준비임을 알고, 자기돌봄을 통해 그 준비를 하라는 데 있다. 여기서 철학은 분명히 인식의 극한에서 시작되는 사유, 자기 실존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고민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무엇이 자기 실존에 유익한지를 알 수 있다.

견유주의자는 파괴적인 행위로 인간의 악덕을 공격하지만, 그 악덕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견유주의자의 전투는 인류를 위한 전투이다. 견유주의가 말하는 철학이 그렇듯 사유 역시 온화하고 멋진 무엇이 아니다. 사유는 우리 삶에 있어서 폭력이나 전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폭력이나 전복은 가치의 단절이 아닌 가치의 전도를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실존을 축소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철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삶을 지속하고 특정한 실존형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규명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고, 소통 불가능한 외침을 계속해서 던져야 한다. 견유주의자들이 했던 그 역할은 현대 예술의 전복적 성격으로 이어진다. 김도희 작가가 보여주는 예술과 에토스에서 푸코가 실존의 미학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견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철학은 인간을 이성의 영역 안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기 위해 동물성을 숨기며, 얼마나 스스로를 축소시켜왔는가를 문제 삼는다. 광기와 동물성 역시 인간의 진실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동물은 혼자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김도희 작가의 말은 동물과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온 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충격과 더불어 과연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윤리적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축소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진실과 권력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스스로가 가진 힘을 확대하면서, 악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묻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와 타자를 통치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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