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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아라차 / 2017-12-10 / 조회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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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실험자들 오픈세미나 에세이 :: 2017.12.16._아라차 [푸코세미나]

 

이토록 끈질긴 표상

 

“말하자면 저는 한 마리의 향유고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잠정적이고 소규모의 물보라의 흔적을 남기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잘 보지 않고 누구도 목격할 수도 없고 확실하다고도 할 수 없는 수면 아래에서 마치 깊고 논리 정연하고 잘 숙고된 일련의 수맥을 그리면서 헤엄치고 있다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강(콜레주드프랑스 1976년 1월 7일)에서 본 문장이다. 1년 이상 진행되고 있는 우리 푸코세미나에는 분명 향유고래의 흔적들이, 그저 물보라가 아닌 어떤 가열찬 수맥으로 흐르고 있을 것이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일 수 있다.”, “‘주체’란 어떤 발견이 아니라 이런 만들어짐이다.”, “‘성’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억압 메커니즘의 재료였다.” 등 당연함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지반들이 무너질 수 있도록 향유고래는 때로는 도식적으로, 때로는 친절하게 부단히도 헤엄을 쳐주었다. 알 것 같았다. 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매번 반복되는 질문. “그러니까 국가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지?”, “서로(주체)를 제대로 알면 파레지아가 가능하지?”, “그래도 억압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잖아?” ……. 과연 뭘 알았단 말인가. “그런 권력이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고정된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고!”, “‘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문제삼는 게 문제라고!”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를 반복해도 그게 아닐 수 없게 만드는 내면의 저항들과 매번 새롭게 마주쳐야 했다. 지금도 여전히. 거대하고 견고한 ‘권력’이라는 표상으로 역사의 밥을 짓고, 비대하고 오만해진 ‘주체’라는 표상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을 역시 밥 먹듯이 해 온 우리들은 이미 표상의 노예였던 것이다. 한 마리의 향유고래가 그리도 가열차게 수맥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집요하고 끈질긴 암맥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이라는 표상으로부터, ‘주체’라는 허상으로부터 우리는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권력’이라는 신앙

 

‘권력’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웅장함이 있고, 궁전이 있고, 왕이 있고, 옥새가 있고, 대관식이 있고, 처형이 있다. 최근에는 레이저눈빛이 있고 철창이 있다. 누구든 죽일 수 있고 휘둘러 위엄을 과시할 수 있고, 어떤 목사는 아들에게 짐짓 ‘고난의 직(?)’을 상속하기도 한다. 무소불위라는 수식어를 가진 ‘권력’,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암맥이다. 철창으로 향하는 전 대통령을 향해 ‘여왕님!’하며 땅바닥에 엎드린 시민들의 모습에서 ‘권력’의 작동법이 여전히 유효함을 본다. 왕조 시대가 끝난 지 이백년이 넘었는데도, 알파고에게 거둔 1승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거대권력의 허상 속에 갇혀버린 누군가들. 그러나 단지 어떤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모습 속에서만 이같은 ‘권력’ 개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남성과 여성, 학벌 있는 자와 없는 자, 부모와 자식, 다수자와 소수자 등 수많은 이항대립 속에서 힘 있는 자들에게는 권력이 있고, 힘 없는 자들에게는 권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대치에 저 거대한 ‘권력’ 개념이 녹아들어가 있다. 크고 거대한 뭔가에 억눌려 엎드려 버리는 권력이라는 ‘신앙’에 우리는 매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어떤 모습인가. 푸코의 ‘권력’에는 힘의 작용이 있고, 기능이 있고, 관계가 있고, 기술이 있다. 그의 말하는 권력은 일종의 ‘에너지’와 같은 느낌이다. 에너지는 일방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든가, 힘 있는 쪽이 힘 없는 쪽을 묵살해버린다든가, 영속적인 승계가 가능하다든가, 통제와 억압으로 조절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커도 약하고, 작아도 쎌 수 있는 에너지처럼 권력은 흐르고 작용하는 어떤 관계들의 양상일 뿐이다. 그래서 약한 쪽이 힘을 합쳐 강한 권력에 저항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저항이 권력을 만들었다”는 명제도 가능해진다.

 

“권력은 권력을 갖고 있고 배타적으로 쥐고 있는 사람들과 갖고 있지 못하고 권력을 참아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눠지는 어떤 게 아니다. 권력이란 유통하는 어떤 것, 아니 오히려 연쇄 속에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결코 여기나 저기로 장소화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의 손 안에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권력은 부나 재산처럼 결코 전유되지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그물망을 통해 행사되며, 이 그물망 위에서 개인들은 단순히 유통하는 게 아니라 늘 권력에 복종하고 또한 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다. 개인들은 결코 관성적이거나 합의적인 표적이 아니다. 개인들은 늘 권력의 중계항이다.”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中

 

푸코가 펼친 “계보학”은 “위계질서와 이론적 전위의 특권을 지닌 총괄적인 담론의 전제가 제거된다는 조건” 하에서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계보학은 “앎들의 봉기”와 관련된다. 기존을 유지해 오던 모든 앎들과 “중심화하려는 권력의 효과에 맞서는 모든 봉기”. 거대권력에 대한 끈질긴 표상, 막강한 신앙에 맞서, “권력은 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며, 행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확언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우리는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암맥에 조금씩 금이 가긴 했지만 말이다. 

 

‘자기’라는 신앙

 

첫 번째 암맥에는 금이 가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두 번째 암맥은 더 끈질기고 견고한데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암울함 마저 느껴진다. 어쩌면 ‘주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주체’라는 표상 말이다. “주체는 없다!”라는 명제가 들리면 지금도 “이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내가 서 있는데 뭐가 없다는 것이냐?”며 따져 물을 사람들이 오조 오억 명은 될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만큼이나 파격과 파국의 드라마를 만들어 낼 것이 뻔하다. 

 

푸코는 1982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서양에서 실천의 소관도 아니고 익숙한 역사 분석의 소관도 아닌 ‘주체’와 ‘진실’의 관계들이 어떤 형태의 역사 내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에 접근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개념은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였다. 

 

“푸코는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글쓰기, 독서의 기술, 자기실천이나 사유와 표상의 점검기술, 자기 인식의 기술 등과 같은 다수의 기술들에 의해 고안되고 구축된다고 전제한다. 그는 고대인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다. 고대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할 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자기 인식’의 작업이 아니었다. 고대의 윤리적 주체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히려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고대 주체의 문제는 자기를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해석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래서 푸코는 주체와 진실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철학사가 그다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은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 개념을 선택한다.” <주체의 해석학> 역자 서문 中

 

이 강의록들을 묶은 책의 제목이 <주체의 해석학>인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주체의 해석학>은 주체의 ‘발견’과 ‘해독’이 아니라 주체의 ‘발명’과 ‘훈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주풀이하듯 나를 속시원하게 해석해보자고 이 책을 잡은 사람은 고대의 다양한 ‘자기배려’의 역사를 보며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표현도 “자기 인식을 규정한 것도 아니었고, 도덕의 토대가 되는 자기인식이나 신과의 관계의 원리인 ‘자기’를 규정한 것도 아니었다.” 커다란 돌덩이를 조각칼로 다듬고 다듬어 그 안에 숨어있던 ‘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신중하게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주체의 해석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주체’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 에토스다.

 

주체는 없다. 아니 하나가 아니다. 아니 적어도 ‘나’를 주어로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나는 원래 이래!”라는 수많은 규정과 허세 속에서 ‘자기’라는 신앙을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어여쁜’ 주체는 포기할 수 없는 십자가일 것이며, 힘의 행사자로서의 ‘주체’가 무기인 사람들에게는 강철갑옷에 다름 아닐 것이다. ‘주체’라는 틀에 갇혀 외부와 그 어떤 관계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십자가와 강철갑옷의 무게 속에서 침잠해갈 뿐인 수많은 ‘주어’들이 우리의 두 번째 암맥이었다. 

 

지도 위를 걸을 것인가, 땅 위를 걸을 것인가

 

우리는 이토록 끈질긴 ‘권력’과 ‘주체’라는 표상에 매번 걸리고 넘어졌다.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새로운 사고의 유입을 차단하는 내면의 저항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푸코의 계보학을 통해서라면 적어도 이 두 암맥과 정면승부를 해 볼만 하다. 더 이상 핑계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왔다”거나 “인류의 역사가 그랬다”거나 하는 것은 가장 지루한 실패다. 철학자들은 새로운 개념을 꾸준히 만들어왔고, 우리는 그 개념을 삶의 실천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오늘도 해방촌 꼭대기를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혹여 차곡차곡 저장해서 머리만 비대해진 ‘자기’에 만족스럽다면 당장 푸코의 책들과 작별해야 한다. 그 머리는 새로운 것을 새기는 머리가 아니라 기존에 알게 된 것들을 되새김질하는 머리일 뿐이다. 

 

일반의미론을 창시한 논리학자 알프레드 코집스키(Alfred Korzvbski)는 “우리는 지도를 실제 그 지역으로 착각한다”고 말했다. 많은 철학자를 섭렵했다는 것은, 그들의 개념을 사용해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겨우 지도 보는 법을 알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는,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권력’과 ‘주체’라는 허상은 우리를 지도 위에만 머물게 한다. ‘권력’을 비난하면서도 ‘권력’의 따뜻한 보호를 꿈꾸고, 거울 앞에 놓인 ‘주체’를 혐오하거나 사랑하면서 말이다. 이 반복을 깨부시는 것이 첫 번째 에토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도 위를 걸을 것인가, 땅 위를 걸을 것인가. 1년 반 이상 푸코세미나를 이어 온 우리들은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앞으로도 기꺼이 향유고래의 등을 타고 지도 밖 검푸른 파도를 헤엄쳐 나아갈 것이기에. 

 

[참고문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난장,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성의역사1> 나남, <하마터면 깨달을 뻔>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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