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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방황彷徨과 소요逍遙
기픈옹달 / 2017-12-12 / 조회 1,385 

본문

<장자>는 흔히 자유自由를 노래한 텍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는 <장자>의 첫 시작 <소요유逍遙遊> 편 때문이겠다. 곤鯤과 붕鵬이라는 기묘한 존재로 시작하는 이 글은 수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크기를 알 수 없는 물고기 곤! 그리고 새가 되여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오르는 붕! <장자>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존재와 헤아릴 수 없는 막막한 세계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아득한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은 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새가 된다. 그 이름은 붕. 붕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기운을 덜치며 날아가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처럼 보인다. 이 새는 바다를 요동치며 아득한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北冥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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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물고기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영화 <나의 붉은 고래(대어해당大鱼海棠)>의 한 장면

 

 

곤과 붕이라는 이 거대한 존재, 북쪽 바다와 남쪽 바다로 표상되는 이 세계에 대해서는 수 많은 해석이 있다. 짧은 지면에서 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까마득히 높은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거대한 새, 여기서 많은 사람이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는 점을 짚어두자. 새처럼 날아오르고 싶은 인간들에게 <장자>는 매려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편의 이름, ‘소요유逍遙遊’는 자유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오강남은 이 편의 제목을 ‘자유롭게 노닐다’라고 옮겼다. 김학주는 ‘어슬렁어슬렁 노님’이라 옮겼다. 참고로 김학주는 그의 <장자> 번역에 ‘절대적 자유를 꿈꾸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영어 번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포린Ziporyn은 이를 ‘Wondering Far and Unfettered’로 옮겼다. 문제는 정작 이 ‘소요유逍遙遊’라는 표현이 <장자> 본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세 글자의 제목은 후대의 누군가, <장자>의 엮은이 혹은 편집자이거나 후대의 주석가가 붙인 것일텐데 이는 소요逍遙와 유遊를 합쳐놓은 것이다. 

 

‘유遊’는 지금도 많이 쓰이는 한자이다. 예를 들어 ‘유희遊戱’라던가, ‘유원지遊園地’, ‘유목遊牧’따위를 생각해보자. 즐겁고, 신나고, 자유로운 무엇이 떠오른지 않는지. 여기에 ‘유흥遊興’까지 더하면 이 글자의 쓰임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글자를 ‘놀다’는 뜻으로 새긴다. 그러나 김시천이 지적했듯 이 글자는 ‘놀다’보다는 본래 ‘노닐다’, ‘돌아다니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놀다’는 뜻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에 의미가 확장, 변형 되면서 위와 같은 뜻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에 지친 우리가 이 글자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과연 그것이 적절한 해석인지는 헤아려 볼 일이다. 

 

사실 장자 당대에 이 ‘유遊’의 쓰임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 있다. 바로 ‘유세객遊說客’이라는 표현이다. 지금도 쓰이는 ‘유세’라는 단어는 수천년 전부터 쓰였다. ‘선거選擧’철이 되면 어디서나 화려한 사람들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저마다 자기를 뽑아 달라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애쓴다. 덕분에 선거철이 되면 볼거리가 풍성해진다. 그렇게 춤을 추고 별 짓을 다하던 인간이 불과 볓 달 후 표정이며 말투가 싹 바뀌는 것도 볼거리라면 볼거리라 하겠다. 

 

그러나 장자 당대의 ‘유세’는 그와 달랐다. 당시의 ‘선거選擧’란 군주의 마음에 들어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순전히 제후왕의 손에 달린 일이었다. ‘유세’가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이미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을 찾아 다니는 일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유세’와는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유세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공자가 있다. 지금의 유세꾼 처럼 그 역시 수레를 타고 돌아 다녔다. 그러나 그가 탄 수레는 영 볼품 없었으며, 유세를 위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그의 꼴 역시 별볼일 없었다. 오죽하면 그를 보고 ‘상갓집 개(喪家狗’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까지 있었을까.

 

이렇게 보면 ‘유遊’란 도무지 낭만적이지 않은 일이다.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 일이란 매우 수고로운 일이다. 훗날 한비자는 유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역린逆鱗’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당시 군주에게 유세하는 일은 얼마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유遊’에서 억척스러움과 고단함을 읽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거기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 떠도는 삶이 묻어 있다.

 

<장자> 내부에서 ‘유遊’는 여러 차례 반복되나 이를 다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앞서 소개한 풀이 처럼 ‘노닐다’는 가뿐하고 편안한 이미지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자. 여전히 해석을 기다리는 ‘개념’이다. 의도치 않게 설명이 길어졌지만 사실 ‘유遊’는 <소요유>편의 주요 개념이라 보기 힘들다. 제목을 지우고 이 편을 읽어보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 큰 숙제는 ‘자유롭게’ 혹은 ‘어슬렁어슬렁’으로 풀이한 ‘소요逍遙’라는 표현에 있다. 이 표현은 <소요유> 끄트머리에 등장한다.

 

지금 그대는 큰 나무를 가지고 쓸모 없다고 걱정하고 있구려. 그 나무를 아무 것도 없는 곳, 드넓은 땅에 심어두면 어떻겠소? 그 곁에서 ‘방황彷徨’하기도 하고, 그 아래 누워 ‘소요逍遙’할 수도 있겠지요. 도끼에 찍혀 죽을 염려도 없고, 해치는 것도 없답니다. 쓸모가 없다고 해서 어찌 마음을 쓰며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今子有大樹,患其無用,何不樹之於無何有之鄉,廣莫之野,彷徨乎無為其側,逍遙乎寢臥其下?不夭斤斧,物無害者,無所可用,安所困苦哉!

 

바로 ‘彷徨乎無為其側 逍遙乎寢臥其下’라는 표현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다. 장자의 친구 혜시라는 사람이 장자에게 묻는다. 자기에게 쓸모 없는 나무가 하나 있는게 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이라고. 크기는 한데 도무지 쓸모가 없어 골칫거리란다. <장자>를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필시 장자를 두고 한 말이다. 네 말은 터무니 없이 크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핀잔. 이 말에 장자의 대꾸가 재미있다. 쓸모 없으면 어떤가? 이를 ‘아무 것도 없는 곳, 드넓은 땅(無何有之鄉 廣莫之野)’에 심어두면 될텐데. 그 곁에서 ‘방황’하며 그 아래서 ‘소요’하면 될텐데. 

 

드넓은 땅에 심어둔 그 나무를 새롭게 이용하는 법이 바로 ‘방황’과 ‘소요’이다. 대구對句를 이루는 이 문장에서 왜 ‘소요逍遙’만이 편의 제목으로 남았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침와寢臥’, 누워서 쉰다는 표현이 <장자>를 읽는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지. 실제로 <장자>를 그려놓은 수 많은 그림 가운데 많은 그림이 누워 잠자는 모습을 담았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호접지몽’의 고사도 큰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을 이루는 ‘방황’과 ‘소요’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은 ‘방황’이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모습을 뜻하는 이 표현이 어디서 처음 등장했는지 그 뿌리를 명확하게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DB의 힘을 빌리면 고대 문헌, 진한 이전 텍스트 가운데서도 <장자>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쓰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여러 쓰임 가운데 <소요유>의 마지막 이 표현은 매우 주목해서 읽어볼만한 구절이다.

 

이 '방황'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유遊’의 다른 쓰임과 짝지어 해석할 여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장자>를 ‘방황’의 텍스트로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장자가 혜시에게 제안한 낯선 공간, 아무것도 없는 곳, 드넓은 땅에 어울리는 것은 ‘어슬렁거리며 노니는 발걸음’보다는 방황하는 사람의 정처 없는 발길이 아닐까?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마태오의 복음서 11:7-8>

여기서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풀이한 ‘無何有之鄉’은 번역자를 매우 고달프레 만드는 표현이다. 오죽하면 이를 그저 ‘무하유지향’이라 그대로 표기한 번역이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무하유無何有’라는 표현의 모호함에서 출발하는 문제이다. 이곳은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이 유효한 것은 장자가 유무有無의 상대적 관념을 가지고 기묘한 사상적 연출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장자가 쓰는 유무有無의 표현은 주의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곳(鄉)은 본디 존재하지도 않는 곳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해질 때 찾을 수 있는 탈출구는 뒤에 이어지는 표현으로 건너 뛰는 것이다. 그곳은 다르게 말해, 광막지야廣莫之野, 넓어 끝이 없는 들판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광야라고 하면 적당할테다. 이 광야는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 사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 바람만이 나를 휘감는 곳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공간으로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자의 우화적 접근을 참고하면 이는 하나의 상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이는 뿌리없는 존재들, 무엇이라는 정의로부터 미끄러져 내려간 이들에게 열리는 기묘한 삶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기억하자, 이 곳은 ‘무용無用’ 쓸모 없는 존재를 위한 공간이다. 거기는 삶을 위협하는 날붙이와 쇠붙이가 닿지 않는 곳이다.

 

<장자>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도끼질이란, 삶을 해치는 다양한 위협을 의미한다. 저마다 쓸모 있는 재목材木들을 베어가는 바람에 쓸모 없는 나무만 산에 홀로 남게 되었다. 양생養生, 생명의 보전 혹은 삶을 가꾸는 법은 <장자>는 물론 도가道家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장자가 여기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간단히 말하기 힘들다. 다만 여기서 그가 살아간 시대가 커다란 혼란기, 이른바 난세였다는 점을 짚어두자. 혹독한 삶은, 삶 자체에 대해서도 나아가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다른 감각을 심어준다.

 

흔히 장자를 두고 어지러운 시대에 자유를 찾아낸 사상가라는 꼬리표를 붙여준다. 실제로 맨 앞에 언급한 곤과 붕은, 특히 붕새의 힘찬 날개짓은 그 자유를 갈망하는 웅대한 몸짓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소요유> 맨 끝의 방황과 연결지어 보면 어째 낯설기만 하다.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오른 이 거대한 새의 비행을 ‘방황’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모호함은 모호함으로 남겨두자. 여기서는 그간의 해석, 이해에서 눈여겨 두지 않았던 부분에 눈을 돌리자. 드러난 것보다 감추어진 곳에서, 밝은 양지보다 어두운 그늘에서 세계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소요유>처럼 <제물론>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부분이다. 특히 ‘호접지몽’의 고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꿈과 현실, 나비와 장주가 뒤섞인 기묘한 이야기. 그러나 호접지몽의 우화 바로 앞에 실린 매력적인 이야기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좀전에는 걷더니, 지금은 멈춰있군요. 아까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나버렸습니다. 어찌도 그리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까?”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기대어 있는 게 있어 그렇겠지! 내가 기대어 있는 것도 기대어 있는 게 있겠지. 그럼 나는 뱀의 껍데기, 매니의 날개 같은 것에 기대어 있는 것이구나! 그러니 어찌 그런줄 알겠으며, 어찌 그렇지 않을 줄 알겠는가?”

罔兩問景曰:「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無特操與?」景曰:「吾有待而然者邪!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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罔兩問景​, 어쩌면 우리 모두 그림자는 아닐까? 

 

옅은 그림자, 그림자 곁에 희미하게 드리운 무엇이 그림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체 너는 왜 그렇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거냐? 따지고 보면 그림자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그림자는 몸이 움직이는대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옅은 그림자도 그림자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져보면 어리석은 질문이다. 옅은 그림자, 존재도 희미한 그가 그림자를 탓해보았자 무엇하나. 그러나 이 근원에 대한 질문은 낯선 질문으로 이끈다. 그림자가 의지하고 있는 존재, 몸통, 이 모든 움직임의 ‘주체’, 그는 어떤 존재인가? 장자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도 어딘가 기대어 있는 부수적인 무엇은 아닐까? 실상 그 몸통도 뱀의 껍데기나 매미의 날개처럼 ‘존재’라 부르기에 미약한 무엇은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그림자 같은 존재일지도. 옅은 그림자건, 그림자건, 몸통이건.

 

내가 보기에 <제물론>은 존재의 평등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기 보다는 ‘인식’의 문제를 다루며, 그것이 얼마나 불안정한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글이다. 이렇게 되면 행동하는 본체, 행동의 이유를 찾기 난감한 것은 물론 무엇인가를 안다는 그 자체도 의문에 붙일 수밖에 없다. 대체 그림자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는 그 무엇을 본뜬, 그것도 단지 형상만을 본뜬 것인데. 

 

그러나 몸통 역시 그림자 같은 존재라면 이 질문은 반복된다.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던 것을 거꾸로 그 몸통에게도 던질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의문이 남는다. 그는, 또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림자가, 껍데기 같은 존재가 대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이 당혹스런 질문의 현장을 장자는 혼돈渾沌이라 부르겠지. 있음과 없음도 모두 집어 삼키는, 거대한 소용돌이. 없음이 있다는 것도 없는 그 무엇!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보면 말 장난 같은 지점이야 말로 <장자>의 핵심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한다. 방황이란 어쩌면 이처럼 말을 잃은 공간에서만 가능한 건 아닐까? 말길을 잃은 곳, 할 말을 잃고 기존의 언어와 개념이 모두 힘을 잃어버린 곳에서만 방황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쓸모가 제 자리를 잃어버린 곳, 그 무엇도 있다거나 없다고 하기 모호한 지점, 우리는 말을 잃고, 나를 잃고, 발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황은 그저 끝없는 방황만 낳을 것인가? 어쩌면 그것도 그 나름의 의미는 있겠으나, 이를 그저 팽개쳐 두지 말고 좀 집요하게 다루어보자. 이를 위해 루쉰의 글을 하나 소개한다. 흥미롭게도 루쉰은 여기서 그림자와 방황을 연결짓는다. 

 

사람이 때가 어느 때인지 모르게 잠들어 있을 때 그림자가 다음과 같은 말로 작별을 고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천당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지옥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미래의 황금 세계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오.
동무,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소. 나는 머무르지 않으려오.
나는 원치 않소! 
오호오호, 나는 원치 않소. 나는 차라리 무지無地에서 방황하려 하오.

<들풀: 그림자의 고별>,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그린비

 

그가 소개하는 그림자의 ‘고별’은 앞서 <제물론>에서 언급한 옅은 그림자의 질문처럼 허망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그림자가 고별을 고한들 어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말에서 우리는 생각지 않은 반전을 만날 수 있다. 그림자는 본질적으로 묶여 있는 존재지만 그는 ‘머무르지 않으려’한다. 그는 그를 낳은 존재를 거부하며 다른 발걸음을 추구한다. 흥미롭게도 그림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차라리 무지無地에서 방황하려 하오.’

 

‘그림자’의 방황이라는 것도 모호하지만 여기에 ‘무지無地’가 더해지면 더욱 모호할 뿐이다. ‘없는 곳’을 가늠할 수도 없는데 방황이라니. 루쉰의 글 만 읽는 사람에게는 모호함 투성이의 글이다. ‘때가 어느 때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림자는 ‘고별’한다. ‘무지無地'에서 '방황’하겠다고. 그러나 <장자>의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무하유지향과 광막지야를 말한, 그곳에서 방황과 소요를 말한 그 목소리는 여기서 그림자를 통해 새롭게 전해진다.

 

어쩌면 장자가 그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것처럼 루쉰 역시 여기서 ‘고별’을 ‘방황’을 말하는 건 아닐까? 장자가 그림자를 통해 존재 자체를 회의했던 것처럼, 루쉰도 여기서 그림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기존의 가치 체계와 선긋기를 선언하는 건 아닐까? ‘어찌 그런줄 알겠으며, 어찌 그렇지 않을 줄 알겠는가?’라는 장자의 질문은 여기서 천당도 지옥도 미래의 황금세계도 가지 않겠다는 부정으로 바뀌어 언급되는 게 아닐까?

 

실제로 루쉰이 <장자>의 저 표현을 염두해두고 이를 썼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이 둘의 공명 속에서 그둘이 말하는 ‘방황’의 이미지를 새롭게 그려볼 뿐이다. 흥미롭게도 루쉰은 그의 문집 제목 가운데 하나에 방황이라는 제목을 붙여 두기도 했다. 루쉰은 <방황>이라는 소설집에서 초나라 굴원의 <이소離騷> 한 구절을 인용해 놓았다. 

 

길은 아득하여 멀기만 하나, 나는 오르락 내리락 하며 찾아보련다.

路漫漫其修遠兮 吾將上下而求索

 

굴원은 초나라 왕족 출신의 관료였는데, 초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슬퍼하며 시를 지었던 인물이다. 그는 궁에서 쫓겨난 이후 멱라강에 몸을 던져 삶을 마감했다. 멱라강에서 어부에게 남긴 말을 보면 그가 당면한 현실의 답답함을 엿볼 수 있다. ‘온 세상이 흐리멍텅한데 나 홀로 똑똑히 깨어 있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멀쩡이 깨어 있구려.(舉世混濁而我獨清 眾人皆醉而我獨醒)’ 안타깝게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강에 돌을 껴안고 몸을 던지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장자도 루쉰도 그렇게 삶을 던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방황’에 삶을 던질 뿐이다. 아득히 멀고 까마득히 동떨어져 있는 그 광막한 대지, 끝 없는 광야 - 이 역시 루쉰이 즐겨쓴 표현이다 -에서 그들은 주저 없이 발을 내딛는다. 오르락 내리락 하더라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더라도 어떠랴.  

 

나는 장자가 이야기한 방황과 소요를 똑똑히 알아채려면 루쉰이 말한 저 그림자의 발걸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어슬렁거리는 산책자의 발걸음은 결코 아니다. 그 뒤꿈치에는 주저함보다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다. 서두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다. 거기에는 굴원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잠깐 언급한 예수의 질문에 묻어 있는 것처럼 단독자의 형상이 담겨 있다.

 

물론 이 표현은 매우 조심스러운데, 왜냐하면 저 발걸음을 내딛는 존재는, 루쉰에게도 장자에게도 개별적 존재로 떨어져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곳이야 말로 세계를 가감없이 만나는 새로운 지평의 지점이 된다.

 

나 홀로 먼 길을 가오, 그대가 없음은 물론 다른 그림자도 암흑 속에는 없을 것이오.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에,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오.

<그림자의 고별>

그림자의 몸짓이 싫어 떼어버리려 달아났던 사람이 있었지. 발걸음을 빨리 할 수록 그림자도 빨리 달렸지. 아무리 빠리 달려도 그림자를 몸에서 떼어낼 수 없었어. 더 빨리 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쉬지 않고 내달렸만 힘이 다해 죽어버렸다네. 그늘에 들어가면 그림자도 사라지고, 가만히 멈춰 있으면 몸짓이 사라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지. 어찌나 어리석은지!

人有畏影惡跡而去之走者,舉足愈數而跡愈多,走愈疾而影不離身,自以為尚遲,疾走不休,絕力而死。不知處陰以休影,處靜以息跡,愚亦甚矣!

<장자: 어부漁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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