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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시와반시 게재_실비아 플라스 편_아래로부터의 시 읽기 +2
희음 / 2018-01-25 / 조회 1,187 

본문

아래로부터의 시 읽기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지난 초여름에는 임솔아를 읽었고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날에는 실비아 플라스를 만나기 위해 둘러앉았다. 햇살이 좋아서인지 아직 반팔 차림을 고수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실험자들>이 자리 잡고 있는 해방촌의 햇빛은 아무래도 조금 더 풍성하니까. 논의할 시편들의 개수를 늘려 고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한 편, 한 편에 대한 보다 세밀하고 밀도 있는 논의 방식에 밀려, 제대로 다뤄진 시는 단 세 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세 편은 우리가 집중적으로 논의하기로 한 주제, 페미니즘을 열고 닫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세 편의 시에 대해서는 여름호에서 택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였다. 대화의 형식을 취하되, 화자에 대한 명기는 생략하는 방식이다. 실비아 플라스와 그의 시에 대해선 미리 말하지 않겠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산책하듯 천천히 따라 걸었으면 한다. 그 이야기 안에 시인과 시의, 거의 모든 신체와 호흡과 그림자가 스며 있을 거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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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상실증 환자

 

부질없다, 부질없다, 이제, ‘알아보라고’ 간청하는 것!
그렇게 완벽하게 멍한 상태에선 그걸 감추는 것 말곤 할 일이 없다.
이름, 집, 차 열쇠,

 

작은 장난감 아내.
잊힌 채, 한숨을 쉬고, 한숨을 쉰다.
아기 넷과 코커스패니얼 하나!

 

벌레만큼 작은 간호사들과 형식적으로 진료하는 의사는
그를 안으로 쑤셔 넣는다.
오래된 사건이

 

피부에서 벗겨진다.
모든 것을 배수구로 내려보내라!
감히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는 붉은 머리 누이처럼

 

베개를 끌어안고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꾼다.
쓸모없다, 제비뽑기는 쓸모없다!

 

그리고 또 다른 색깔의 제비뽑기.
어떻게 그들이 여행을 할까, 여행을 할까, 여행을 할까
그들의 오누이 관계를 야기하는 풍경은

 

혜성의 자취!
그리고 정액이 묻은 돈.
한 간호사가

 

녹색 음료를 가져오고, 한 간호사는 파란 음료를 가져온다.
그들은 별처럼 그의 양쪽에서 솟아오른다.
둘은 불꽃 같은 광채와 거품을 들이마신다.

 

오 누이여, 엄마여, 아내여,
달콤한 레테의 강은 나의 인생이다.
나는 결코, 결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 

(1962년 10월 21일)


▶ 이 시는 얼핏 보면 시적 화자가 둘인 것처럼 보여요. 마지막 연은 남성 화자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그 외의 나머지 연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쓰여져 있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형식일 뿐이고 실은 하나의 화자에서 두 화자로 이중화되었다거나 혹은 분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죠.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쓰인 대부분의 연들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적 의도와 심적 의지가 빠짐없이 반영된 듯한 행위와 선언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4연의 ‘모든 것을 배수구로 내려보내라!’ 라든지 5연의 ‘쓸모없다, 제비뽑기는 쓸모없다!’는 구절은 마치 ‘그’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은 음성이거든요.

 

▶ 맞아요. 그러니까 이 시는 한 남자의 일관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게 외부의 목소리이든, 내면의 목소리이든. 그 남성 화자를 만들어 낸 건 다름 아닌 시인 실비아 플라스죠. 시 바깥에서 창조주처럼 한 인물을 주무르고 빚어 시적 화자로써 형상화한 셈인데, 거기에는 시인이 평소 감각하고 체험했던 한 남성에 대한 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우리는 여기서 어렵지 않게 실비아의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라는 남성을 떠올리게 돼요. 마지막 연에서 그 남성 화자는 ‘오 누이여, 엄마여, 아내여,’라 호명하며 여성들을 향한 하나의 선언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갈무리해요. 그런데, ‘누이’와 ‘엄마’와 ‘아내’는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취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름이자 위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점을 유념한다면 시 안의 ‘그’는 단순히 실비아 플라스의 개인적 체험 안에만 있는 특정한 ‘한’ 남성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죠. 시인은 당대의 남성 보편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시 안에 녹여 넣으려고 했던 듯해요.

 

▶ 그렇다면 ‘완벽하게 멍한 상태’라는 첫 연의 표현은 물론이고 ‘기억상실증 환자’라는 제목부터가 남성 보편에 대한 강력한 조롱인 거네요. ‘이름, 집, 차 열쇠,’ ‘작은 장남감 아내’, 그리고 ‘아기 넷과 코커스패니얼 하나’는 그가 머물렀고 그가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던 집 혹은 가정에 대한 대유물들일 텐데, 그는 그것을 잊었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감추’기까지 해요. ‘작은 장난감 아내’라는 표현 자체도 주목해 볼 만한데요, 아내란 그에겐 작고 초라하고 장난감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이죠. 코커스패니얼은 귀가 길고 다리가 짧은 강아지의 한 종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 그 강아지는 ‘아내’와 동일한 선상에 놓인 채로 불려나오고 있어요. 둘은 모두 소품이면서 또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가지고 놀기 좋은 대상에 불과해요. 유희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거죠.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영혼 없는 대상이기도 하고요. 

 

▶ 1, 2연의 딱딱하고도 사실적 분위기와 달리 3연에 가서 그 시적 상황은 은근한 성적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어요. '작은 간호사들'과 '의사'가 '그를 안으로 쑤셔 넣는다.'고 하는 표현이 3연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쑤셔 넣’어지는 '그'는 다름 아닌 그의 성기의 다른 말 같거든요. 병원이라는 곳이 마치 남성적 성행위, 혹은 매춘의 장소, 그것을 위한 안전한 방이자 적극적 매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 네, 그 점에서 3연과 4연이 굉장히 문제적으로 보여요. 여기서 간호사와 의사는 자신들의 직업적 소임대로 그의 기억상실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억상실을 돕거나 부추기는 사람이 되고 있거든요. 4연의 '오래된 사건이 피부에서 벗겨진다.'는 구절은 그의 기억이 그에게서 탈락하고 씻겨져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 그가 그 병원에 밀어 넣어지는 일이면서, 혹은 병원으로 표상되는 누군가의 몸 안으로 그의 성기가 쑤셔 넣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그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었을, 잠시 잊었다 해도 기어이 되살려 내어야 했을 '오래된 사건'은 그가 병원 안에 듦으로 인해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다시는 그에 대한 기억을 건져낼 수 없을 법한 '배수구' 속으로 영원히 빨려 들어가게 되는 셈이에요. ‘배수구로 내려 보내’지는 것은 그가 손쉽게 기뻐하며 배출해낸 정액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그토록 붙들리기를 원했을 그의 이름과 집과 차 열쇠, 아내와 같은 오래된 기억이겠죠.

 

▶ 그 병원은 어쩌면 남성 중심의 사회 체제를, 혹은 그것을 강력하게 지탱하게 해 주는 남성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에 관한 상징적 형상물이 아닐까요. 사회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병원이라는 시설이 한 남성의 기억상실 상태, 즉 도덕적 해이, 부도덕 상태를 유지시키거나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니까요. 5연, 6연, 그리고 7연은 누이와의 근친상간과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손으로 만져본 적도 없는 붉은 머리 누이’는 ‘새로운 꿈’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시적 화자의 대표적 욕망 대상으로 그려져 있어요. ‘누이’와의 관계는 초역사적으로 금기의 상징이죠. 금기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강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함없이 욕망되는 거고요. 그 관계는 남성이 행하는 모든 부도덕한 관계, 부도덕한 관계에 대한 욕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원래 누리고 있었거나 자신의 기반이 되어주었던 관계, 즉 아내나 집, 아기 넷 등과의 관계를 모조리 망각해 버리고 그 밖의 관계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거죠.

 

▶ 오누이 관계에 대한 욕망이 실재화되는 풍광 다음에는 본격적인 매춘 장면이 이어지는 듯도 해요. 7연의 '정액이 묻은 돈'이라는 구절이 그 점을 입증해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남성이 그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실 자체도 종국에는 잊어 버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8연에서 간호사가 가져다 주는 '녹색 음료', '파란 음료'가 그 망각의 촉매 역할을 하죠. 이번에도 그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간호사입니다. 앞서 언급된 그를 '쑤셔 넣는' 행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간호사들은, 망각을 돕는 마법의 약을 그에게 투여하고 있거나 혹은 그 두 마법의 약물로써 그를 망각하게 하기 위한 축제의 장면을 선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원은 결국 남성성을 곤고히 하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였다는 말이 됩니다. 남성이 사회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는 이상, 그의 기억상실을 치료할 방안은 없는 셈인 겁니다. 

 

▶ 그렇다면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무척이나 비겁한 자로 보이는군요. 그는 자신의 과거의 기반이 되어 주던 아내에 대해 ‘장난감’이라 칭하며 영혼 없는 존재로 치부해요. 그런데 누이에 대한 욕망은 또 어떤가요. 그것은 단지 ‘감히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되어지는’ 껍데기 같은 욕망이에요. 그런 화자에게 묻고 싶어요. 너는 한 번이라도 네 욕망의 진실에 대해 물어본 적 있느냐고요. 7연에 나오는 ‘혜성’이라는 비유 역시 그의 그런 헛것으로서의 삶을 꼬집는 것으로서 쓰이고 있는 듯해요. 혜성은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고, 늘 사라지면서 자신이 남긴 먼지만을 보이는 존재니까요. 어떤 중심의 주변만을 돌 뿐인데 그 자신은 ‘혜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죠. 시 속에서 남자도 가족 내의 관계, 욕망 실현이라는 두 가지 중심에 대해서 그 주변을 돌기만 해요. 자신이 속해 있는 단단한 남성중심의 기존 체제인 사회에 의해 그는 자신의 이름 또한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부여받게 되고요. 이 시에서 ‘병원’으로 표상되어 있는 그것에 의해서 말이죠.

 

▶ 제 경우 ‘제비뽑기’라는 낱말이 무척 도드라져 보였어요. 5연 마지막 행에서 남자는 ‘쓸모없다, 제비뽑기는 쓸모없다!’라는 말을 하는데, 제비를 뽑으면 그 제비 안에 쓰여진 글자가 나의 행위를 결정짓는 거잖아요. 제비를 통해 내 생의 다음 스텝이 정해지는 거죠. 어쨌든 제비는 내 손으로 뽑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엄연한 하나의 선택이에요. 다음 연에서 남자는 ‘그리고 또 다른 선택의 제비뽑기.’를 행하는 것으로 그려져요. 제비뽑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라는 절차에는 가담하면서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울타리나 행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가차 없이 잊는 거죠.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에 의해 경계 지어진 어떤 관계도 그에게는 필연적이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거죠. 그저 바로 다음 제비뽑기로 넘어가 유희하면 되는 거예요. 어떤 것도 기억하거나 의미화하지 않으려 하는 자니까요. 그 자에 대해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이는 부분을 꼽는다면 아마 마지막 연의 두 번째 행이 아닐까 싶어요. ‘달콤한 레테의 강은 나의 인생이다.’ 상습적으로 잊는 자, 잊음으로써, 자신을 지탱시켜 주었던 모든 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매일 편안해지는 자에 대한 칼 같은 비유예요.

 

▶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을 쭉 따라가다 보면 이 시의 제목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억상실증’이라는 건 단순한 사건이거나 특정한 누군가를 덮친 질병이 아니라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데올로기, 혹은 사회를 구동시키는 체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 모든 남성들로부터 여성을, 즉 그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기반이 되어 준 여성을 배제시키는 것은 물론 그러한 배제의 역사와 불구적 관계를 재생산하도록 조장하는 체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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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식 없는 여인


자궁은
배를 덜거덕 소리 나게 하고, 달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나무에서 내려온다.

 

내 상황은 손금이 없는 손이다.
길은 매듭으로 모아지고,
매듭은 나 자신.

 

나 자신은 네가 얻은 장미다.
이 몸,
이 상아는

 

어린아이의 비명처럼 신앙심이 없고.
거미처럼, 나는 거울을 실로 짓는다,
내 이미지에 충실하게,

 

피만을 언급하면서.
그것, 검붉은 피를 경험하라!
그리고 내 숲 속,

 

내 장례식,
그리고 이 언덕과
시체들의 입으로 이 희미하게 불타는 것. 

(1962년 12월 1일)


▶ 느낌이 묘한 시예요. 슬픔의 정서와 전투적 에너지가 동시에 느껴진다 할까요. 이 시는 실비아 플라스가 죽기 두 달 전에 쓴 시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한 예감과 자기파괴적 충동이 스며 있기도 한 듯해요. 한편으론 삶에 대한 의지도 그 못지않게 베여 있는 듯 보이고요. 문체가 특히 그래요. 고정관념을 흐트러뜨리면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와 선언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화법이 도드라지거든요. 그건 나를 좀 주목해 달라, 알아봐 달라는 목소리이기도 해서, 자꾸 이 시를 쓰던 시인의 시간과 책상을 떠올리게 돼요. 그 책상의 시간은 얼마나 냉랭하고 또 뜨거웠을까. 

 

▶ 주목받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적어도 저는 그 목표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고 생각해요. 1연에서부터 눈이 번쩍 뜨이거든요. 자궁이란 한 인간이 여성이라는 성으로 태어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몸 안에 지니게 되는 생리적 기관이에요. 그것은 나의 ‘태어남’만큼이나 나의 선택을 넘어서는 수준의 주어짐이에요.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내가 구성되는 조건이고, 그런 기관들이 모여 나를 이뤄요. 그런 기관들은 흔히 내 안에 있어도 나로 하여금 그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는 못하게 해요. 그런데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자궁이 ‘배를 덜거덕 소리 나게 하고’ ‘달’ 즉 생명을 품기 위한 자궁 같은 달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나무에서 내려온다.’라고 말해요. 자궁을 낯설고도 어리둥절하게, 버겁고도 거치적거리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나무는 남성에 대한 상징으로 보이는데요, 나무에서 내려온다는 건 자궁에 본래부터 부여된, 혹은 부여되었다고 믿는 생식에 대한 소임을 더 이상 다하지 않겠다는 것 아닐까요. 남성성에 기생하는, 기생해야만 하는 것으로 운명 지워진 어떤 기원을 거부하겠다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

 

▶ 2연에서도 그 같은 거부에 관련된 서술은 일관되게 이어져요. 손금은 손 안에 그려진 운명의 지도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시적 화자는 자신의 상황을 ‘손금이 없는 손’이라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지도에 대한 거부죠. 지도는 자연으로서 구축된 세계에 대한, 혹은 그것에 뒤이어 역사가 낸 길에 대한 반영이자 축소판이기도 한데, 화자는 자신의 구술로써 그것을 무화시키려 하고 있어요. 길의 매듭 또한 자기 자신이라 일컫는데, 길을 하나의 사회 체제나 화자를 둘러싼 모든 고정관념들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내가 매듭짓겠다는 것은, 화자에게 부여된 방향이나 지침 같은 것을 내가 몸소 비틀고 틀어막아서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일 테니까요. 

 

▶ 저는 4연이 흥미롭게 읽혀요. ‘어린아이의 비명처럼 신앙심이 없’는 시적 화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지우고 그 자신의 순수하고도 원초적인 욕망과 감정에 집중하는 자예요. 니체는 『아침놀』이라는 저작에서 인간의 본성을 1차적 본성과 2차적 본성으로 구분하면서, 우리는 흔히 2차적 본성만을 우리 본연의 본성이라 믿으며 살게 된다고 하거든요. 2차적 본성이란 사회가 사회적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겹겹이 덧입혀진 의식과 규범에 의해 빚어진 것이죠. 제 안의 어린아이를 전면으로 불러내는 시적 화자의 의도는 그런 2차적 본성, 사회가 씌운 모든 이름을 거부하겠다는 거겠죠.

 

▶ 4연에서 ‘거미처럼, 나는 거울을 실로 짓는다,’라고 한 표현도 놀랍지 않나요. 어떻게 거미와 거울을 나란히 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항, 이질적 이미지들인데, 그것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효과의 힘이 만만치 않거든요. 거울은 반사를 담당해요. 거울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대상을 비추이는 반사 작업에 의해 그 존재 가치가 생길 뿐 아니라, 그 권력이 현실화되기도 해요. 그때 거울 앞에 서게 되는 반사의 대상은 수동적이고 나약할 수밖에 없어요. 비추어지는 대로 비추어질 뿐이고,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는 것으로 거울과의 관계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시에서 화자는 거울을 자신의 몸에서 나온 실로 짓겠다고 해요. 나를 비추던 기성의 거울을, 그리고 그 기성의 거울을 비추어 보면서 거울이 알려주는 진실로만 나의 실체를 확인하던 기존의 일상을 거부하겠다는 거죠. 나를 반사하는 도구조차도 내가 직접, 내 몸을 떼어 만들겠다, 나와 나의 인식 사이에 어떤 이물적인 것도 끼어들지 않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1연에서 자궁을 ‘덜거덕’거리는 것으로 느끼고, 2연에서 ‘손금이 없는 손’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상황을 선언하던 것과도 일맥상통해요. 이 모든 말들을, 세계의 모든 규정과 질서에 대항하는, 사방에서 다른 얼굴로 포획하여 들어오는 힘들에 대항하는 전면전에 관한 선전포고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리스 신화에서 거미는 운명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져요. 또 일반적으로 직조하는 행위는 여성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죠. 운명을 뜻하는 포르튜나(Fortuna)라는 단어 자체도 여성형 명사예요. 혹 실비아 플라스는 거미와 거미로부터의 직조라는 언급을 통해 여성의 대표로서 발화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우리의 몸과 행위와 선언의 연대를 통해 우리의 운명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외침의 말은 아닐까 하는. 한 힘에 대해 다른 힘으로 맞섬으로서 세계와 자신을 뛰어넘으며 스스로의 운명을 갱신하는 강자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니체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 시를 자꾸 읊조리다 보면 자기 선언의 과잉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당시 이렇게까지 솔직하고 대담하게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크나큰 무릅씀이 있었을까, 내면 깊숙이 눌려 있었을 주체성을 발견하고 끄집어내기까지 얼마나 뼈아픈 과정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커요. 최근 발간된 오나 도나스의 저서 『엄마 됨을 후회함』에서 얘기하는 바대로 엄마 됨을 후회하는 것, 혹은 엄마 됨에 질문을 품는 것 자체에 대한 윤리적 잣대는 지금도 여전히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날카로워요. 그런데 아이 둘을 낳은 실비아 플라스가 이미 1960년대에 ‘자궁’을 거부하고 기각하겠다는 식의 발화를 통해 그런 사회적 통념과 맞서는 작업을 해 내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워요. 혼자서 벌였던 그 전투는 또 얼마나 외로운 것이었을까요. 그런데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 이후, 그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와 결혼해 살았던 아씨아 베일이라는 여성 또한 시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감행했다고 해요. 뜬금없지만 저는 그것이 여성들 간의 무언의 연대는 아닐까, 무언의 연대를 통해 또 하나의 전투를 이어가는 방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요.

 

▶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시에 대해 처음으로 했던 누군가의 말이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시에 죽음에 대한 예감과 자기파괴적 충동이 스며 있기도 한 듯하다는 이야기 말예요.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 시가 쓰여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썼다고 보여서요. 다시 말해 어떤 목적에 의해 언어화된 죽음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는 거죠. 죽을 거니까 봐 달라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라도 나는 보여주겠다, 나는 말하겠다는 식인 것이고요. 죽음이 직접 언급된 마지막 연을 볼까요. ‘내 장례식,/그리고 이 언덕과/시체들의 입으로 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 앞서, 몸의 실을 뽑아서 거울을 만드는 거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마지막 연의 ‘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다름 아닌 화자가 지은 거울인 건 아닐까 싶어요. 내가 내 몸에서 뽑아낸 실로 직조한 거울은 나를 나로써 비추는 것이면서 나의 숲이기도 하고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이기도 할 테니까요. 즉 내가 죽게 될 장소이기도 하다는 거죠. 시적 화자는 자신에게 짐 지워진 사회적, 태생적 통념의 굴레를 기각하는 자이니까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무엇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는 순전한 자신에게로 돌아가 죽을 거예요. 거울을 실로 짓는 행위가 하나의 비유라면 현실 세계에서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말하고 새롭게 선언하기를 그치지 않는 실천을 통해 구체화될 테죠. 그런 ‘시체들의 입’은 죽어서도 빛날 수 있고, 빛나고야 말 거예요. 기각하고 다시 선언하고 직조하던 여성들은 이제 죽음으로써 싸움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빛’을 내며 다시금 새로운 국면의 싸움을 시작하는 거예요. 시체들의 입이 된 자기 자신을 전시하는 방식의 새로운 싸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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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당신은 하지 마, 당신은 하지 마
이제는, 검정 구두가 아니야
나는 그걸 삼십 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지,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재채기도 못하면서.
 
아빠, 나는 당신을 죽여야 했지.
당신은 내가 그러기 전에 죽었지.
대리석처럼 무겁고, 신으로 가득 찬 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처럼 크고
잿빛 발가락 하나가 달린 무시무시한 조각상
 
아름다운 노셋 앞바다로
강낭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의 곶처럼 거대한.
나는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를 하곤 했지.
오 아빠.
 
전쟁, 전쟁, 전쟁의
굴림대로 납작하게 밀린
폴란드 마을에서, 독일어로.
하지만 마을의 이름은 평범하지.
내 폴란드 친구는
 
비슷한 이름이 열두 개 아니 그보다 많이 있다고 말하지.
그래서 나는 결코 당신이 어디에 발을 대딛는지,
뿌리를 내리는지 말할 수 없고,
당신에게 말을 걸 수도 없지.
혀가 턱 안에 박혀서 꼼짝도 않지.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 안에 박혀 있지.
나, 나, 나, 나,
나는 말을 할 수 없지.
나는 모든 독일인은 아빠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음란한 언어.
 
유대인처럼 나를 실어 나르는
기차, 기차.
다하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가는 유대인.
나는 유대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지.
나는 내가 유대인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티롤의 눈, 비엔나의 깨끗한 맥주도
아주 순수하거나 진짜라고 할 수 없지.
 
내 집시 혈통과 기이한 운명과
내 타로 카드 점괘, 내 타로 카드 점괘를 보면
나는 약간은 유대인이지.
 
나는 항상 당신을 두려워했지.
독인 공군과 난해한 언어를 지닌 당신을.
말끔한 구레나룻과 아리안 족 혈통의 밝고 파란 눈동자를.
장갑차 조종사, 장갑차 조종사. 오 당신.
 
신이 아니라 나치의 만자가
아주 까맣게 덮고 있어서 하늘이 뚫고 나올 수 없었지.
모든 여성은 파시스트를 숭배하지.
얼굴에 있는 장화 자국과 당신처럼
잔인한 사람의 잔인한 잔인한 심장을.
 
아빠, 내 사진 속에서,
당신은 칠판 앞에 서 있지.
발이 아니라 턱이 움푹 팬 절개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덜 악마적인 건 아니지, 아니지
덜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내 예쁜 붉은 심장을 두 개로 찢어놓은 악마.
그들이 아빠를 땅에 묻었을 때 나는 열 살이었지.
스무 살 때 나는 죽으려 했고
당신에게 다시, 다시, 다시 돌아가려 했지.
뼈라도 되돌아 가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들은 나를 자루에서 끄집어내어
접착제로 붙여놓았지.
그리고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지.
나는 당신의 모델을 만들었지.
악마의 표정으로 고문 형틀을 좋아하는
 
검정 옷을 입은 남자.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
하지만 아빠, 이제 완전히 끝났지.
검은 전화기는 뿌리째 뽑혀서,
목소리가 기어 나오질 못하지.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시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아빠, 이젠 돌아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지.
그리고 말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지.
아빠, 아빠, 이 게자식, 나는 다 끝났어.  

(1962년 10월 12일)


▶ 이 시 <아빠>는 시인의 대표작 중 가장 널리 알리진 시라고 해요. 실제로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는 시인이 여덟 살 때 당뇨합병증으로 죽었다고 하죠. 아버지의 죽음은 시인에게 평생 큰 트라우마가 되어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시인의 아버지는 독일어와 생물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는데, 실비아 플라스는 그를 틈나는 대로 책을 읽어주곤 하던 다정한 아버지로 기억하면서도 그에 상반되는 이미지 또한 간직하고 있었나 봐요. 잊고 싶었거나 부정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 무의식 아래에 잠자고 있던 아버지의 다른 얼굴이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인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시인을 옥죄게 되고,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정념을 분열적으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닌가도 싶어요.

 

▶ 시인과 시적 화자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고 보아서는 안 될 테지만, 시 안에서도 ‘아빠’에 대한 시적 화자의 감정은 온통 모순적인 것들로 뒤엉켜 있어요. 전체적인 서사의 라인을 따라가 보면, 자신에게 거의 모든 것이었던 아버지가 폭군이면서 극도로 위협적인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시적 화자는 애증의 이중적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그려져요. 금세 폭발할 것만 같은 그런 심적 혼란과 곤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바로 아빠의 죽음이고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눈앞의 실체로서 시적 화자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당사자인 아빠는 이제 없으니까. 남겨진 모든 모순들은 남겨진 자가 고스란히 다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 하지만 여기서 ‘아빠’는 단순히 혈통적 의미에서의 아버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시의 후반부에서 시적 화자는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이라는 언급을 하는데, 이 구절이 지시하는 대상은 그 바로 앞선 연을 참고할 때 자신의 남편에 다름 아님을 짐작할 수 있거든요. ‘검정 옷을 입은 남자./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라고 하는 말에서요. ‘검정 옷’이 턱시도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다음 행의 ‘그렇게 하겠다고’에 해당하는 영어 원문은 ‘I do'로서, 서양 결혼 예식의 공식적인 서약 맹세에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거든요. 그 다음 시구로 돌아가 보면, 1년이라는 숫자는 실비아 플라스의 실비아의 남편 테드 휴즈가 본격적으로 집을 나가 외도를 일삼았던 기간에 부합하고, 7년이라는 숫자는 결혼 생활의 총 기간과 일치해요. 다시금 시적 화자를 시인에 투사하게 되는 셈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아빠’가 ‘남편’으로 전이되거나 동일시되는 양상으로 시가 흘러가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결국 ‘아빠’는 실제 아버지이면서 남편, 그리고 어쩌면 더 나아가 시적 화자를 억압하는 모든 남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해요. 화자를 억압하고 화자를 고통 속에 살게 했던 ‘아빠’의 자리에 ‘남자’가 하나의 대리보충으로써 들어간 것으로 본다면 말이죠. 남편으로 짐작되는 그 ‘남자’가 죽거나 ‘남자’의 존재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지면 그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겠죠.

 

▶ 그런데 ‘검정 옷을 입은 남자’가 아빠의 자리에 대신 들어차게 되는 건 시적 화자의 욕망과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이네요. ‘나는 당신의 모델을 만들었지,/악마의 표정으로 고문 형틀을 좋아하는//검정 옷을 입은 남자.’라고 말할 때 그 ‘남자’는 시적 화자가 말하는 ‘당신의 모델’일 테고 그것은 화자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 모델은 ‘악마의 표정으로 고문 형틀을 좋아하는’ 누군가이며, 화자를 갖은 방법으로 짓누르고 괴롭힐 것이 뻔한 존재인데 왜 그런 존재를 다시금 불러내었을까요.

 

▶ 시적 화자의 ‘아빠’는 화자에게 있어 잔인한 악인이자 화자를 고통과 무력감에 떨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화자는 그를 사랑하기도 했잖아요.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3연이 그런 마음을 조금 엿보이고 있는 듯해요. ‘아름다운 노셋 앞바다로/강낭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변덕스러운 대서양의 곶처럼 거대한./나는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를 하곤 했지./오 아빠.’ 3연이 없다고 해도, 증오심이든 경멸이든 아빠에게서 오래도록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건 그의 존재가 화자에게 그만큼 치명적인 힘을 갖는다는 거니까. 앞에서도 언급되었듯 아빠의 ‘죽음’이 오히려 화자를 아빠의 세계에 더 단단히 동여매어지도록 만들기도 했겠고요. 화자는 어쩌면 고통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아빠의 죽음의 순간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려는 무의지적 의도로 읽히기도 해요. 아직 아빠를 온전히 보내지 못한 거죠. 혹은 그 자신이 아빠의 죽음 속에서, 죽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거나.   

 

▶ 아빠의 자리에 ‘남자’를 대체해 넣는 것을 좀 더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는데요? ‘내가 한 사람은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라고 시적 화자는 말하고 있거든요. 이미 죽은 아빠는 다시 죽일 수 없으니까, 그와 닮은 누군가를 대신 죽이는 거죠. 마지막 연 마지막 행에서도 ‘이 게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고 외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원문을 확인해 보면 정확히는 ‘You bastard, I'm through.’라고 되어 있어요. ‘I'm through’는 ‘나는 너랑 끝났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시 전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쓰였다고 보아도 무방한,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이 자칫 잘못 읽힐 수도 있도록 번역되어 있는 건데, 실상 이것은 시인의 자포자기의 말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해 왔던 관계를, 그리고 그 스스로 자신을 동여매어 왔던 관계에 대한 오랜 강박을, 이제는 기어이 끝내고 또 끊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혀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시적 화자의 고통 욕망하기는 종국에 가서는 어쨌든 욕망 자체를 위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이 마지막 선언과 관련된 하나의 분명한 목표 설정 뒤에 놓여 있는 욕망으로 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그 스텝을 밟아간 건 아니겠죠. 무엇으로도 끝낼 수 없었던 심적 혼란과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던 끝에 도달한 희미한 빛에 가깝겠죠. 완전한 환한 빛 안에 들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하나의 선언을 통해 그 검고도 깊은 관계의 수렁을 빠져나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화자의 의지적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다시 약해지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다짐과 선언이 필요할 거예요.
         
▶ 앞선 시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는 억압의 주체인 남성 보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요. 이 시 안에서 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주된 억압의 방식은 무엇인가를요. 여성으로 보이는 화자가 이 시 안에서 괴로워하도록 만드는 가장 강력한 억압 기제는 다름 아닌 ‘언어’로 보여요. 아빠는 독일인인 반면, 화자는 유대인으로, 화자의 친구는 폴란드인으로 그려지는 데서 ‘아빠’와 ‘나’ 사이를 단절하고 위계 짓는 분할선이 바로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시 초반부터도 시적 화자는 아빠 앞에서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재채기도 못’하는 상황이 드러나 있고 말예요. 6연에서는 ‘나, 나, 나, 나,’하면서 말을 더듬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죠. 특히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못하죠. 그런데 6연의 ‘나, 나, 나, 나,’라는 것에 대해 역으로, 말을 하려고 끝없이 시도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숨쉬기도, 재채기도 못하던 화자가 어찌됐든 어떤 말이든 시작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죠. 말하기에 대한 그러한 시도, 즉 시동 걸기라고도 보이는 그것이 조금씩 들끓다가 종국에 가서 ‘아빠, 아빠, 이 게자식, 나는 너와 끝났어.’라는 말로 폭발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언어적 억압에 눌린 채 힘겹게 비어져 나온 그 곤란과 참담의 더듬거림은, 자신을 온전한 형태로 꽃피우기 위한 씨앗으로써 차고 어두운 땅 밑에서 이미 제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슬픔과 곤혹의 힘이 주체적인 발화로 승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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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 플라스' 라는 이름은 흔히 우리에게 그의 치열한 시 쓰기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시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그는 아이들이 다음 날 먹을 아침을 넉넉하게 챙겨놓고, 아이들 방으로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접착테이프로 문틈을 꼼꼼히 봉한 뒤, 오븐에 머리를 박고 가스에 천천히 질식되어 죽어갔다고 한다. 우리가 읽은 시편들은 그가 그렇게 죽기 전 몇 년에 걸쳐 쓰여진 것들이었다. 그의 남편인 테드 휴즈는 실비아 플라스를 일컬어 상대에 대한 병적인 외도 강박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던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편들 중 실제로 남자의 외도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시가 쓰여진 때는 테드 휴즈가 집을 나가 다른 이와 보금자리를 꾸몄던 시기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실적 배경과 공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편들을 단순히 그의 일상적인 슬픔과 괴로움, 자신의 사적 관계에 대한 회의나 번뇌만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치부하는 일 자체를 문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에는 인간 보편, 남성 보편, 세계 보편에 대한 마음 앓이와 성찰이 차고 넘치게 출렁거리고 있다. 이번에 함께 시를 읽으며 그 점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자신이 겪은 개인적이고도 구체적인 어떤 사건에 대한 직면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시인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그 가까운 주변을 뚫어지게, 끝까지, 치열하게 응시하는 시간을 고수해 왔기에 그의 목소리는 더 아름답게, 더 멀리까지 나아가도록 트이게 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곤란의 뿌리를, 너무도 곤고하고 부조리한 사회 체제, 혹은 ‘자연’이란 이름으로 옥죄어 들어오는 모든 굴레와 더불어 사유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번에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두고 이야기하는 데 보다 중점을 둔 부분은 시 안에서의 여성의 목소리, 즉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의 내용형식이었다. 그의 시는 그 조건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사회 내 여성, 가족 내 여성의 입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두드러졌다. 해방과 변혁의 주체로서 새로운 균형감각을 선보이는 일에도 시인은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그 재능이 재능으로 빛나는 데에는 그의 문학적 표현형식이 8할 이상의 기여를 한 듯 보였다. 이를 테면 이질적인 낱말들의 배치, 그러나 그보다 더 적확한 차용이란 없을 것만 같은 언어의 실험적인 배치 작업을 통해 시인은 의미 너머의 의미를 상상하게 하고, 연대 너머의 연대를 꿈꾸게 했다. 혼란스러운 듯 치밀한 시 전개 방식 또한 유수의 상징주의 시인들 못지않은 탁월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그는 여성주의 시인으로 한계 지어져서는 안 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언어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열정을 지닌 여성 시인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냉혹하고도 기우뚱한 현실, 그 곤혹스러운 간극이 어쩌면 그를 끊임없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

 

참여 멤버 소개

 

박성희(흴옹)
여전히 될성부르고 싶은 자칭 어른 꿈나무. 피터팬이자 라푼젤이고, 손오공이자 빨간머리 앤이고 싶은 - 한마디로 산만한 인간. 필연처럼, 우연처럼 <우리실험자들>에 간혹 빨대를 꽂아 기생하길 즐긴다. 꽤나 넓지만 아주 얕은 지식의 탈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준비된 실험대상. 현재는 작사를 한답시고 끼적거리는 중.

 

김승운
지구별 주민. 옛것을 좋아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이는 세상의 풍경들에 관심이 있다.

 

임신영(토라진)
여러 고전들을 탐방하는 ‘고전여행자’이다. 최근에는 연구공동체 <우리실험자들>에서 ‘생동성 실험군’의 참여자로 활동하고 있다. 상식과 질서의 테두리를 부수는 작은 이야기(소설)들에 눈과 귀를 열고 손과 발로 담아내려 노력 중이다.

 

최원
대륙철학, 정치철학, 맑스주의, 정신분석학 등을 연구하는 철학자이지만 18세기 이전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랬듯 별다른 소속 없이 이리저리 떠돈다. 『라캉 또는 알튀세르』를 썼지만 만족스럽지 못해, 청년 시절 가졌던 시에 대한 열정을 <우리실험자들>의 시 읽기 세미나에서 되살리려고 무리하고 있는 철학자.

 

문희정(희음)
순간과 하루와 한 생의 지형도를 그릴 때 시 쓰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실은 변두리를 따라 배회하는 걸 더 즐겨 한다. 요즈음은 시와 소설과 에세이와 그 밖의 모든 글쓰기, 혹은 기록들, 그 경계의 철망의 구멍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일에 특히 관심이 많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시와반시> 2017년 겨울호에 게재된 <시의 공백 속으로> 시즌4 세미나의 '실비아 플라스'편입니다.
'*자식'이란 말이 금지어로 되어 있어 '게자식'이라고 표기했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오래 전 떠돌던 풍문처럼 아련합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 또는 우리를 불러내 주신 희음님의 필력과 정성스러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매번 사진 찍고, 녹취하고 정리하느라 늘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책으로 나오는 걸 보면 늘 뿌듯하더라고요. ~~
동토의 땅에서 따뜻한 햇살을 맞는 풍경을 선물 받아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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