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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광인의 우화 :: 강사인터뷰 - 渾沌, 깨달음의 야생성
우리실험실 / 2017-06-25 / 조회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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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인터뷰 - 기픈옹달]  渾沌, 깨달음의 야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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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冥有魚,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북쪽 넓은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있으니, 그 이름이 곤鯤이다. 

곤의 둘레가 몇 천리가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물고기는 변화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이 몇 천리가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붕이 가슴을 활짝 펴고 날아오를 때, 그 양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일렁일 때 남쪽 넓은 바다를 향해 가려고 한다. 

 

≪장자≫의 제1편 <소요유>는 이렇게 북쪽 바다의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도입부에서 ≪장자≫가 어떤 책인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이야기의 허무맹랑함입니다. 측정가능하지 않은 상상하기 어려운 중국식 ‘뻥’이라고 할까요. 이런 이야기는 현실에 도움이 되는 지식이나 교훈이 결코 아닙니다. 벼슬길을 준비하는 선비를 위한 책은 아니지요. 

 

하나 짚어둘 것은, 중국인에게 ‘북쪽 바다’란 순전히 상상의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상상의 공간에 솟아오르는 터무니없는 ‘물고기-새!’ 이는 기존 사유의 흐름을 깨고 까마득한 세계 너머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이는 갑갑한 오늘의 현실을 찢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 

 

장자가 말하는 앎은 도구화되지 않는 지식입니다. 장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학자들은 저마다 당대의 혼란을 잠재울 방법을 내놓았지요. 게다가 제후들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지식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 같은 지식의 도구화를 경계했습니다. 과감하게 쓸모없는 지식을 주장했습니다. 

 

이점에서 장자의 ‘루저 감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당대 사회의 주류가치와 전혀 다른 길을 개척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장자의 이런 태도를 ‘중국적 정신승리’의 시작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혼란을 바로잡기는커녕, 여기서 등을 돌린 채 자신의 보신 만을 꿈꾸었다는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주장, 장자의 감성이 그저 세상에 대한 냉소와 허무를 가져온다는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장자 특유의 저항방식입니다. 

 

장자가 비록 당대의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발을 뺐지만, 그렇다고 장자식의 정치적 삶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는 정치를 거부하는 저항으로서의 정치적 삶을 이야기합니다.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이지 않지만, 기존체계에 순응하는 것도 아닙니다. 통상적인 사유를 깨뜨리고 현실을 찢어버리는 방식을 통해 그는 새로운 혁명의 순간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이 품고 있는 쓸모, 이는 삶을 전복적으로 뒤집는 혁명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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渾沌, 깨달음의 야생성 

 남쪽 바다의 황제는 급속함(숙儵)이고, 북쪽 바다의 황제는 맹렬함(홀忽)이며, 

 중앙의 황제는 혼돈渾沌이다. 

 급속함과 맹렬함은 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아주 후하게 대접하였다. 

 급속함과 맹렬함은 혼돈의 덕에 어떻게 보답할지 의논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통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쉰다. 

 그러나 혼돈만 그런 구멍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그걸 뚫어주자.” 

 그들은 매일 구멍을 하나씩 뚫었고,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죽었다.

 

장자가 말하는 깨달음에는 어떤 야생성이 있습니다. 장자는 도道의 내용, 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는 도를 대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바로 혼돈입니다. 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뒤섞임의 존재이며,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더듬어 찾아야합니다. 객관적 지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기존의 틀을 깨트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장자는 도에 대한 태도 가운데 無知, 모름을 중시여깁니다. 어쩌면 모름이야말로 진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명확하게 도를 인식하려는 태도, 혼돈을 없애려는 태도야말로 장자가 경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장자는 혼돈으로 나아가라 말합니다. 

 

知止其所不知, 모름을 사유하라 

 

장자는 알지 못하는 데 머물러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앎이라고 말합니다. 바꿔 말해 무지를 이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름, 무지란 과감한 행동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됩니다. 여기에서 장자의 정치학이 보여주는 현실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종의 혁명적 정치학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혁명, 현실의 전복이란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지요. 현세의 인간에게 혁명은 무지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장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장자는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제약을 풀어줄 것인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에 장자식 삶의 건강함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 운명, 죽음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목소리에 담긴 위안

 

≪장자≫의 위안은 루쉰의 글이 선물해주는 것과 닮았습니다. 루쉰은 적막 속에 외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외침이란 희망찬 소리가 아닙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철의 방’에서 외치는 그의 목소리엔 절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절망하지 않기’에 그는 목소리를 냅니다. 이때 찾아오는 위안은 희망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저 ‘잘 될 거야’하는 값싼 위로도 아니며,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위안도 아닙니다. 

 

저는 이번 강의에서 기존의 도가道家적 해석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선처럼 자유로운 삶을 이야기한 책으로 ≪장자≫를 읽지 않으려 합니다. 도리어 당대의 처절한 현실을 살아간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내편>만 집중적으로 읽습니다. 장자 고유의 목소리를 가장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롤러코스터 같고, 미꾸라지 같은

 

장자의 글을 읽는 것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도 같고, 미꾸라지를 잡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다가 현실의 맨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기도 합니다. 한편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고, 잡았다고 소리치는 순간 슬그머니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장자≫를 읽는 것은 다른 여느 책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에서 발견할 수 없는 당혹감 때문에 처음에는 읽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당혹감을 즐기면서 장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잡기 놀이를 하듯 장자의 말 속에 담긴 보물들을 찾아보면 ≪장자≫ 공부에 들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장자≫는 동아시아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탁월한 표현, 매력적인 이야기. 숱한 문인들이 장자의 글을 참고하여 훌륭한 글을 지었습니다. 수요일 세미나에서는 원문으로 ≪장자≫를 읽을 텐데, 그 시간에 이 문장의 갖는 다채로움과 신선함도 함께 느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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